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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리코 페르미

- 근대 이태리 물리학의 자존심

엔리코 페르미(Enrico Fermi ; 1901-1954)가 14살이 되던 어느날, 그는 로마거리의 구시장안으로 걸어들어가 고서적들이 즐비하던 진열대를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얼마 후, 그는 흥미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1840년에 라틴어로 씌여진 물리학 책이었다. 이 어린 책략가는 이미 투영기하학과 수학에서 쓰이는 다른 도구들에 관해서는 통달한지 오래되었다. 그리고 그는 지금 물리학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엔리코는 뛰어난 암기력을 가진 덕분에 대개의 경우 책을 한번만 읽으면 그만이었다. 몇년이 지난 후에도 그는 여전히 단테의 <신곡>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작품들 대부분을 암송할 수 있었다. 말할 필요도 없이, 엔리코의 학교성적은 우수했다. 대학에서 엔리코는 이론에 관한 물리학 문제를 푸는데는 거의 무적에 가까웠다. 

그러나 1920년대인 그때까지 물리학자란 결국 실험물리학자를 의미했다.
엔리코는 엑스선의 회절에 관한 연구를 굽은 크리스탈을 가지고 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에 관한 논문은 그의 박사학위 취득을 거의 확실하게 했지만, 그는 보다 안전하게 두개의 논문을 제출하였다.
 
로마 대학에서 직위를 얻은 후, 페르미는 자신의 실험능력을 개선시키는 데 관심을 돌렸다. 얼마 안가서 그는 기계적인 것들에 매우 정통하게 되었다. 실제로 다음과 같은 일이 있었다. 한번은 강의차 미국으로 출장을 간적이 있었는데 거기서 그는 "나르는 거북"이라는 이름의 자동차를 샀다. 도로에서 차에 어떤 문제가 생겼고 그는 근처 주유소에 차를 세웠다. 엔리코는 아주 능숙하게 차를 수리했고, 이를 지켜보던 주유소 사장은 즉석에서 일자리를 제의했다. 더욱이 이때는 바로 대공황의 한 가운데서였다.
 
페르미의 실험능력은 곧 보다 큰 성공을 거두었다. 1932년에 중성자가 발견한 후, 그는 중성자다발을 쏘았을 때 생겨나는 방사능을 연구하는 그룹의 장이 되었다. 이 그룹은 실험장치가 나무로된 테이블위에 놓였을 때와 비교하여 대리석위에 놓였을 때 다른 결과를 얻었기 때문에 의아해했다. 페르미는 대답을 찾았으며 천천히 움직이는 중성자들이 더 큰 방사능을 갖는 것을 발견하였다. 이와같은 노력이 그에게 1938년도 노벨상을 안겨 주었다.
 
핵분열의 가능성은 Ida Noddack에 의해서 보다 일찍 제의된 바 있었고, 페르미 또한 그 가능성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중성자 다발을 이용한 그의 모든 연구에서 그는 핵분열에 관한 어떠한 증거도 발견할 수 없었다. 후에 핵분열이 발견되었을때, 페르미는 자신의 부주의로 인한 실수를 크게 나무랐다.
페르미는 콜롬비아 대학의 직위를 받아들였고, 후에는 시카고 대학으로 옮겨갔다. 그는 이동안 내내 핵분열과 연쇄반응의 가능성에 대해서 곰곰히 생각하였다. 이 당시 유럽은 한창 전쟁 중이었고 미국은 이탈리아인들을 가리켜 "적국의 국민들"이라고 선포했다. 페르미의 우편물은 검열을 받아야 했고 출국 또한 금지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최초의 원자로를 고안해냈고, 1942년에 이는 임계상태에 도달하여 28분 동안 1/2와트의 전력을 일으켰다. 다음으로 그는 로스알라모스로 옮겨와 원자폭탄을 설계했다.
 
페르미의 비상한 암기력과 어려운 문제를 단순화시키는 뛰어난 능력은 때로는 그를 신들린 것처럼 보이게끔 하기도 했다. 만약 페르미가 어떤 문제에 직면하여 정답을 모른다고 해도, 누군가가 몇개의 숫자를 그에게 들려주면 그는 정답에 눈을 반짝여 맞힐 것이라는 소문마저 돌기도 했다. 문제를 풀어내는 그의 능력은 실로 대단했지만, 말년에는 젊은 물리학자들의 세미나에 참석해서 전혀 알아들을 수 없다고 불평을 늘어놓는 지경에까지 이르고 말았다. 단지 강연의 마지막 한마디만이 그를 감동시킬 수 있었다. 즉, 그 한마디는 "이것이 바로 엔리코 페르미의 베타붕괴 이론입니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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