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T Link
ㆍ조회: 9884    
막스 플랑크

- 과학의 진보를 이끈 강력한 자극

20세기 전환기에 막스 플랑크(Max Planck;
1858-1947)의 연구가 이론을 탄생시킴으로써 물리학의 근본 구조를 영원히 바꾸어 놓았다. 근간이 되는 그의 업적이 너무도 탁월하기 때문에 그는 아이작 뉴턴, 알베르트 아인슈타인과 동렬에 놓이기도 한다. 아인슈타인도 그의 연구가 "과학의 진보를 이끈 강력한 자극이었다"라고 쓴 바 있다. 막스 플랑크는 실제로 물리학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인물이고, 과학자들에게도 이상하리만치 매력적인 우상이다. 천성적으로 보수적이었던 그는 겉보기에는 보잘것없지만 이론적으로는 아주 중대한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려 했다.
막스 카를 에른스트 루트비히 플랑크는 1858년 4월 23일 발트 해의 항구 킬에 서 태어났다. 게르만 혈통인 아버지 요한 율리우스 빌헬름 폰 플랑크는 유명한 헌법학자였다.

플랑크는 뮌헨의 막시밀리안 김나지움에서 교육을 받았다. 공부를 잘하기는 했지만 그렇게 눈에 띄는 학생은 아니었다. 물리학에 흥미를 느끼고 1874년 뮌헨 대학에 들어가 1879년에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박사 논문은 열역학 제2법칙과 관계된 것으로, 거기서도 그가 근본적인 문제에 사로잡혀 있음을 알 수 있다. 외부 세계가 '절대적인' 무엇이라는 그 기대가 그에게는 도전이었다. 플랑크는 "이런 절대적인 것에 작용하는 법칙을 탐구하는 것이 내겐 일생의 가장 숭고한 과학적 목적처럼 보였다"고 썼다. 뮌헨과 킬의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나서 1889년 베를린 대학의 교수가 된다. 그곳에서 1928년까지 있으면서 많은 위업을 쌓았다.


플랑크가 양자를 발견한 배경에는 19세기 말 물리학자들을 괴롭힌 '흑체 복사' 문제가 놓여 있다. 그가 측체 복사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그 문제가 근적으로 중요하다는 단 한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1859년 구스타프 키르히로프의 발견에 따르면, 물체의 복사열의 성질은 순전히 온도와 파장에 달려 있고 물체 자체의 성질과는 관계가 없다. 어떤 보편적인 효과가 작용하는 것이다. 물리학자들은 '흑체'가 어떻게 복사열을 방출하는지 검토했지만 곤란한 결과에 부딪쳤다. 고전 법칙에 의하면 모든 복사 에너지를 흡수한 물체의 복사라면 응당 무한한 양의 열과 빛을 가장 짧고 보이지 않는 자외선 파장에서 최고의 강도로 방출해야 한다. 그러나 실험에서 확인된 사실은 이와 달랐다.

용광로처럼 가열된 구멍에서 복사되는 빛은 밝은 황색에서부터 적색, 청색, 그리고 가장 뜨거운 '백열'에 이르는 스펙트럼을 발산한다. 고전 물리학은 이 스펙트럼을 예측할 수 없었다. 가장 짧은 파장에 관한 실험에서 예측과 크게 빗나간 결과가 나타나기 때문에 '자외선 카타스트로프(파국)'라 부르기도 했지만, 흑체 복사 문제는 19세기 물리학에서 사소한 쟁점이 아니었다. 이는 열역학 제1법칙을 위협하는 것이었다. 열역학 제1법칙에 따르면 열은 에너지의 한 형태이며 열에너지는 역학적 에너지와 마찬가지로 새로 생성되거나 소멸되지 않고 보존된다.

1897년부터 몇 차례 실패를 맛보고 나서 플랑크는 흑체 복사를 예측하는 공식을 만든다. 빛과 열이 끊이지 않는 흐름으로 방출된다는 기본적인 고전 물리학의 관념은 당연히 포기했다. 에너지는 불연속적 단위 혹은 다발로 복사된다. 플랑크는 새로운 보편 상수를 발견했는데, 그 상수를 이용해 스펙트럼의 관찰결과를 측정할 수 있다. 플랑크의 수학이 물리학 이론에 확고하게 기초를 두고 있었지만, 이른바 '플랑크 상수'는 노력의 결실이자 '행운의 추측'이었다. 무한소의 시간에 의해 늘어난 소량의 에너지를 나타내는 아주 작은 수 h를 플랑크는 '기본 작용 양자'라 불렀다. 이 수에 의해서 관찰 가능한 범위의 스펙트럼 현상과 일치하는 이론 방정식이 탄생한다. 실제로 뜨거워진 구멍에 모인 진동은 오직 특정하고 제한된 에너지의 열을 복사한다. 그 에너지의 가장 작은 단위가 바로 양자이다. 가령 쪼개진 양자, h/2는 없다. 플랑크는 1900년 12월 양자에 관한 최초의 논문을 발표하여 양자 물리학을 탄생시켰다.

플랑크 상수가 흑체 복사 법칙으로 일반화되면서 그 중요성이 실로 근본적이며 어마어마하다는 사실이 입증되었다. 플랑크 상수는 고전 물리학에 어긋났고 물리학자들을 난처하게 만들었지만 실험 결과와 일치했기 때문에 받아들여진다. 1905년 아인슈타인은 양자설을 이용해 광전 효과를 설명함으로써 어떻게 빛이 입자의 흐름처럼 운동하기도 하는지를 보여 주었다. 또 그로부터 오래 지나지 않아 1913년 닐스 보어는 플랑크의 접근법이 담고 있는 폭넓은 의미를 원자 모형의 개발에 이용했다. 원자를 태양계의 축소 모형으로 상상한 고전적 원리를 적용하는 대신에, 이제 원자 내부에서 전자가 플랑크 상수를 써서 양자화된 특정 값을 지닌 궤도상에서만 작동하는 그런 체계로 원자를 파악하게 된다.

플랑크는 1919년 노벨 물리학상르 받았는데, 그 무렵 이미 꽤 알려진 유명 인사가 되어 있었다.
1928년 베를린 대학을 떠났고, 2년 뒤 카이저 빌헬름 학회의 회장이 되었다. 그 학회는 뒷날 그를 기념하여 이름을 바꾼다. 하지만 나치 비판으로 적잖은 위험에 봉착하여 히틀러 시대에는 그도 학회를 떠나야 했다. 1930년대에는 다섯 권으로 된 '이론 물리학 입문'과 '물리학의 철학' 등 몇 권의 책을 펴냈다.

플랑크는 때론 아인슈타인과 함께 바이올린을 켜기도 한 뛰어난 연주가 였다. 그의 인생에도 그늘이 없을 수는 없었다. 첫째 부인인 마르가 폰 회슬린과 결혼하여 2남 2녀를 두었다. 두 딸은 출가하여 아이를 낳다가 사고로 목숨을 잃었으며, 한 아들마저 1차 대전 때 잃었다. 또 다른 아들은 어른이 될 때까지 살았지만 실패한 히틀러 암살 계획에 연루되어 사형당했다. 거기다 2차 대전이 끝날 무렵 집과 사실상 그의 모든 논문이 연합군의 폭격으로 사라졌다. 신앙심이 돈독해서 눈을 감을 때까지 자애로운 신을 믿었다.  그는 아흔 번째 생일을 얼마 앞둔 1947년 10월 4일 눈을 감았다.
420
1,718,8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