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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스 폰 라우에
 
X선 결정학의 선구자
 
1912년 어느 날 막스 폰 라우에(Max von Laue)가 동료인 아르놀트 조머펠트를 만나러 갔는데, 마침 그는 파울 에발트(Paul P. Ewald)와 에발트가 하고 있던 분자 실험들의 특징에 관해 토론하고 있었다. 이때 라우에는 결정체의 구조가 원자의 배열로 인해 3차원의 회절 격자나 결정 격자처럼 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놀랐다. 그는 이 지식을 바탕으로 획기적인 실험을 진행하여 X선 회절로 알려진 기술을 고안함으로써 일찍 노벨상을 타게 된다. 
X선 회절은 다른 방법이 없었을 때 분자의 원자 구조를 해명했으며 20세기 물리학의 중요한 도구가 되었다. 이는 현미경 검사법 및 분광학과 경쟁하면서 모든 물질의 구조를 밝히는 데 실마리를 제공한 X선 결정학의 토대가 되었다. 이러한 발견으로 X선이 전자기 스펙트럼의 일종이라는 사실이 증명되었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게 라우에의 발견은 "물리학에서 가장 아름다운 발견 가운데 하나"였다. 이 책에서도 당연히 안톤 반 레벤후트와 구스타프 키르히호프와 나란히 라우에를 다루고 있다.

 
막스 테오도어 펠릭스 폰 라우에(Max von Laue; 1879-1960)는 1879년 10월 9일 독일에서 군 장교인 율리우스 라우에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그의 집은 아버지의 직업 때문에 자주 이사를 다녔다. 어렸을때 철저하고 진지한 성격이었다는 평을 들었던 라우에는 일찍이 물리학에 관심을 가졌으며 베를린의 과학 협회인 '우라니아'를 자주 찾았다.

베를린 대학에서 막스 플랑크의 지도를 받아 1903년 우등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박사 학위 논문은 광학 분야로 광파의 상호 작용에 관한 것이었다.
  1905년 라우에는 베를린 대학의 이론 물리학 연구소로 돌아와 막스 플랑크의 조교가 되었다. 1905년 발표된 알베르크 아인슈타인의 특수 상대성 이론 논문의 놀라운 중요성을 처음으로 인식한 젊은 물리학자들에 속했고, 그것을 광학에 적용하기 시작했다. 실제로 1907년 광학에 근거하여 상대성에 대해 중요하면서도 실험에 입각한 증명을 제공했다. 그의 연구는 상대성 이론의 수용에 이바지했고, 1911년에는 여전히 논란이 되고 있던 그 이론을 풀이한 설명서 '상대성 원리'를 출간했다. 이와 함께 라우에는 1909년부터 뮌헨 대학에서 광학과 열역학을 강의했으며 그곳에서 아르놀트 조머펠트와 사귀었다.
 
 1895년 X선이 발견된 뒤 그 성질에 관해 많은 추론과 실험이 뒤따랐다. 찰스 바클라(Charles Barkla)의 실험은 X선이 전자기 스펙트럼의 일종이며, 그렇지만 빛보다는 길이가 훨씬 짧은 파동이라는 것을 강력하게 시사했다. 하지만 증명되지는 않았다. 1912년 조머펠트가 X선 파장에 대한 도해를 제시했다. 이를 계기로 라우에는 만약 X선 파동이 실제로 가시광선보다 더 짧다면 그것이 회절 격자의 어떤 결정형을 통해 드러날지도 모른다는 가설을 세우게 된다. 그가 우연히 결정체가 결정 격자 같은 구조를 지니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은 바로 그때였다. 그 길로 라우에는 동료들에게 제안해서 작은 구멍을 통해 황산아연 결정체에 X선 빔을 쬐는 실험을 진행했다. 결정체의 뒤에는 감광판을 놓았다. 실험결과는 아름답게 대칭을 이루는 형태로 나타났다. 그 날, 그러니까 1912년 4월 21일 저녁 늦게 집으로 돌아온 뒤, 라우에는 광학상의 결정 격자를 측정하는데 사용된 계산 결과의 엄청난 가능성을 깨닫게 되었다. 원칙적으로 자연에 존재하는 화합물 분자들 전체가 비슷하면서 개별적인 형태로 형성될 수 있었다. X선 회절은 원자의 기본 구조를 밝혀 주었을 뿐만 아니라 X선의 파장을 측정하는 수단을 아울러 제공했다. 라우에가 진행한 연구의 중요성은 금세 인정받았으며-실제로 대단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여러 사람에 의해 재빨리 수용되어 널리 확산되었다. 윌리엄 로렌스 브래그와 그의 아버지 윌리엄 헨리 브래그(William Henry Bragg)는 곧 X선 결정학의 기틀을 잡았다. X선 결정학은 결정체와 분자의 구조를 조사하는 데 이용되었다. 또한 모리스 드브로이(Maurice de Broglie)는 X선 분광학을 개발했고, 이것을 헨리 모즐리가 곧바로 활용하여 원소의 주기율표를 개정했다.
 
 라우에는 1914년에, 브래그 부자는 그 이듬해에 노벨상을 수상했다. 라우에는 취리히 대학과 뷔르츠부르크 대학에서 몇 년 동안 강의를 하다가 1919년 베를린 대학으로 돌아와 늙은 막스 플랑크와 함께 연구했다. 그 뒤 초전도 연구에서 성과를 올렸지만 여전히 많은 점에서 고전 물리학자로 남아 있었다. 그래서 양자 이론의 개발에는 별로 관여하지 않았다.   라우에는 나치 통치기의 참담한 독일 과학사에서 가장 뛰어난 인물이었다. 아인슈타인이 1933년 외압에 의해 카이저 빌헬름 연구소에서 물러나자, 그는 프로이센 과학 아카데미의 동료 단 두명만이 동참한 가운데 강력하게 항의했다. 공공연한 반나치주의자였지만 2차 대전 동안 강단에서 물러난 채 독일에 머물러 있었다. 은퇴 전에 라우에는 이후 독일의 과학을 재건하는 일에 참여했으며, 1950년부터 1959년까지 프리츠 하버 물리 화학 연구소 소장으로 일했다. 라우에는 1910년 마그달레네 데겐과 결혼하여 두 아이를 두었다. 등산과 배 타기를 좋아했고 존 폰 노이만처럼 고속 주행을 즐겼다. 그는 1960년 4월 8일 자동차 폭발 사고로 다쳤으며 두 주 뒤인 4월 23일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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