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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버트 아인슈타인
 
- 신의 은총을 가장 많이 받은 물리학자

아인슈타인(A. Einstein; 1879-1955)만큼 일반에 널리 알려진 물리학자는 없으리라. 그러나 아인슈타인하면 떠올리게 되는 그의 상대성이론 만큼이나 잘못 알려져 있는 것도 드물다고 할 수 있다.  알버트 아인슈타인은 1879년 3월 14일 독일의 울름에서 출생했다. 1880년 아인슈타인의 아버지의 사업이 경제공황에 의해 실패했고 일가는 뮌헨으로 이사했다. 뮌헨에서 아인슈타인의 아버지는 아들 야콥과 함께 전기공장을 열었다. 1888년 알버트는 지진아였고 9살의 나이에도 더듬더듬 말했다. 
그의 아버지는 별로 신앙심이 깊지 않아서 유태인의 규칙을 관습정도로 생각했기 때문에 유태인인 알버트를 카톨릭 학교에 보냈다. 아인슈타인은 권위주의적인 독일학교를 싫어했고 늘상 교실에서 말썽을 일으키기 일쑤였다. 

1884년에 알버트의 가족은 이태리 밀란으로 이사하면서 아인슈타인을 하숙집에 맡겼다. 그러나 두달 뒤에 그는 신경쇠약으로 고통받고 있다는 의사의 진단을 받게 된다. 그의 아버지의 사업은 계속 실패를 거듭하여 더 이상 알버트의 학업을 시킬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알버트는 엔지니어가 되는 것을 싫어했고 이론물리학자가 되고 싶어했다. 아인슈타인은 스위스 취리히의 연방공과대학에 들어가려 했지만 입학시험에서 실패했다. 그러나 그의 수학능력이 뛰어났기 때문에 그들은 그를 스위스 아라우에 있는 간톤 학교로 보냈다. 알버트는 수학과 실용적 학문을 강조하는 자유로운 분위기의 아라우에서의 생활을 즐겼으며, 그해 말에 대학교에 입학할 수 있는 자격시험에 합격했다. 아라우에서의 교육은 후일 아인슈타인의 사고형성에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게 된다. 아인슈타인은 자유로운 생각을 많이 할 수 있었던 이 시절 이미 물체가 빛과 같은 속도로 달리면 어떤 현상이 나타날 것인가에 대한 생각에 골몰했다고 한다. 결국 그의 위대한 업적인 상대성이론은 스위스 아라우의 자유로운 교육환경에서 배태되었다고 할 수 있다.

 1896년 1월 28일 알버트는 그의 독일 국적을 포기하고 무국적자가 되었다. 1896년 스위스 취리히의 연방공과대학에 입학한 아인슈타인은 물리학과 수학 교사로서 교육을 받았으나 흥미를 갖지 못하고 자신이 볼츠만, 헬름홀츠, 헤르츠키르히호프 등의 책을 읽고 맥스웰의 전자기학에 대해 공부했다. 또, 아인슈타인은 뉴턴, 패러데이, 암페어 등의 업적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이때 즈음 보편적으로는 공간의 구석구석을 채우고 있는 에테르(ether)라고 불리우는 물질을 믿고 있었다. 아인슈타인은 에테르가 정말로 필요한가 알아내려고 하였다. 그리고 그는 빛의 속도로 빛과 함께 여행하면 어떻게 될까 궁리하였다. 알버트는 천재라고 불리우는 것이 싫었기 때문에 그의 생각을 혼자서만 간직했다. 그러나 그는 곧 흥미있는 것을 알아차렸다. 만약 당신이 거울을 가지고 빛의 속도로 함께 움직인다면 빛은 거울에 도달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거울에 비친 당신의 모습이 사라지게 될 것이다. 알버트는 이것을 10년 동안이나 탐구하게 된다. 1900년 연방공과대학을 졸업한 아인슈타인은 같은 해 스위스국적을 얻는다.
 
1901년 Mileva Marec 과 결혼한 아인슈타인은 두 아들을 두었으나 후에 이혼하고, 1917년 그의 사촌 엘사 아인슈타인과 재혼을 한다.  1902년에 아인슈타인은 베른의 스위스 특허등록소 심사관이 된다. 이때 그는 공부할 수 있는 많은 시간을 갖는다. 그 결과로 1905년에 4편의 중요한 논문들을 발표하게 되었다. 또, 1905년 취리히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마흐(Ernst Mach)의 연구를 공부했는데 이는 그가 에테르 이론을 떨처버리는 것을 도와줬지만 그러나 그는 마흐의 역학적 과학론에 동의하지도 않았다. 아인슈타인이 생각했던 것은 빛이 어떻게 한 속에서 다른 곳으로 이동하던 간에 그 상이 사라져서는 안된다는 것이었다. 만약 그가 1초에 30만 km 의 속력으로 움직이고 그의 얼굴을 떠난 빛도 같은 속력을 같는다면 빛은 지면에 대해서는 매초 60만 km 의 속력을 같는 것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이 옳은 것처럼 보이지 않기 때문에, 그는 빛의 속력이 움직이는 관찰자나 지면에 서있는 관찰자에게 모두 같을 수 있는 방법이 없겠나 찾는 노력을 시작했다. 이것만으로도 그는 거의 신경쇠약에 걸릴 지경이었다. 그는 후에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 속에서 특수상대성이론이 태동할 무렵 나는 온갖 정신적 압박에 시달려야 했음을 시인할 수 밖에 없다. 그와 같은 의문에 처음 부딪쳤을 때의 어안이 벙벙한 상태처럼 어렸을 때 나는 혼란스러운 상태에서 몇주일씩 돌아다니곤 했다."
 
찾기가 불가능할 것 같이 보인 이 해답이 바로 알버트 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성이론이었다.  이외에도 아인슈타인은 통계역학과 양자이론에서 중요한 기여를 한 찬란한 업적을 그것도 거의 동시에 이뤄냈다. 이들은 콜로이드와 같이 미세입자들이 떠있는 액체에서 입자들의 브라운운동에 관한 것과 그에게 노벨상을 안겨준 광전효과의 이론, 그리고 물질과 시공간의 상호작용을 다룬 일반상대론이다. 또, 그는 뒤에 통일장이론으로 그의 중력이론을 발표하였다. 1933년 미국에 정착한 아인슈타인은 프린스턴 고등연구소의 종신회원이 되었으며 1955년 4월 18일 프린스턴에서 세상을 떠났다.  아인슈타인의 유머 -
 
"만약 상대론이 옳다고 판명된다면 독일인들은 나를 독일사람이라고 부를 것이고, 스위스 사람들은 스위스 시민이라고, 그리고 프랑스 사람들은 나를 위대한 과학자라고 부를 것이다. 그러나 상대론이 틀릴 경우에는 프랑스인들은 나를 스위스 사람이라고 할테고, 스위스인들은 나를 독일사람이라고, 그리고 독일사람들은 나를 유태인이라고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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